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메리카 연합국 (문단 편집) == 경제와 산업 == 흔히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공업과 식량작물의 북부 그리고 환금작물의 남부라고 하는 것이 옳다. 물론 환금작물의 남부라고 식량작물을 키우지 않은 건 아니고 식량작물의 북부라고 농산물을 수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남부의 식량작물 생산량은 유럽의 곡창지대를 능가하고 있었다. 남부, 정확히는 노예주들의 경제적인 가장 큰 약점은 공업 생산 능력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공업지대도 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 포함), 테네시, 켄터키 등 경계주들이거나 북쪽의 남부주들에 쏠려 있었는데 전쟁 초반에 이들이 점령당하거나 전란에 노출되는 통에 남부는 이 공업 생산 기반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실패한다. 게다가, 노예주라도 화약회사 [[듀폰]][* 현재도 있는 그 화학회사 듀폰이 맞다.] 등 북부와 공업인프라를 공유하고 있던 회사들은 북부 편에 붙는 통에 어려움이 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부 엘리트 지주들이 나름 계산이 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노예가 키운 면화로 인해서 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들이 북부가 아니라 남부였으니, 부족한 공업능력은 영국에서 목화 판 돈을 주고 수입해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실제로 미국이 해상봉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밀수꾼들이 영국 등에서 무기를 수입한다. 하지만 문제는 철도였다. 남부의 대지주들이 미시시피 강을 이용한 수로운송을 선호했기 때문에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딱 필요한 최저수준의 철도만 건설되어 있었으며 이마저도 대부분 사설철도였던지라 철로 규격마저 전부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남부의 인구 대비 식량작물 생산 자체는 문제가 딱히 없었으나, 부족한 철도망에 더해 수로운송의 허브였던 테네시의 내슈빌,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그리고 버지니아 항구도시들의 이른 함락으로 인해 전략적인 군수물자 수송에 매우 애를 먹었으며 이후에는 사정이 너무 나빠져서 1/10법(이름 그대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민간인이 가진 1/10에 한에서 강제로 징발하는 것을 합법화한 법안)같이 민간인들의 식량을 징발하는 방법으로 버티게 된다. 당시 북군 병사들이 '오늘은 커피 베이컨 빵, 내일은 베이컨 커피 빵, 모레는 빵 베이컨 커피'를 먹는다며 투덜거렸다는 것은 반쯤 과장에 가깝다. 철도와 수운이 용이하여 보급이 자유로웠던 동부전선의 북군 주력군대였던 포토맥군은 보급사정이 매우 양호했지만, 깊숙히 적진에 진격한 통에 잦은 남부 기병대의 철도파괴 및 병참기지의 약탈행위로 인해서 보급이 비교적 불안정했던 서부전선의 북군은 보급의 일정 이상을 현지조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영향으로서부전선의 진격로는 주로 수로수송, 철도수송이 편리한 도시들을 위주로 이뤄졌다. 북군이 애틀란타 점령 이후 다음 점령지를 서배너로 고려한 이유도 해운을 통한 보급을 받기 위함이었다. 당시 너무 깊숙히 진격하여 남군 기병대에게 길게 늘어진 철도망을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에 용이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수였다. 남군이 필사적으로 빅스버그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도 사실상 그 시점에서 미시시피 수운로에서 마지막으로 남군이 지키고 있던 거점이 빅스버그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빅스버그의 전략적 중요성이 과장되었다는게 요즘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그랜트 휘하 북군의 연이은 승전으로 남군은 사실상 미시시피 강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뉴올리언스를 되찾는데도 실패하여 수로수송의 요충지로써 빅스버그의 중요성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도 빅스버그를 함락함으로써 3만명에 가까운 남군 병사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완전히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획득한 덕분에 북군의 사기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점에 있어서 전쟁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전투였다는데는 여전히 다들 동의한다.]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도 지키려고 노력한 이유도 애틀랜타가 남부의 중요 공업지역이라는 것도 있지만 또한 철도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대국적인 준비가 부족했던 이유는 결국 남부가 원자재(면화)를 수운으로 북부나 영국의 공장에 수출하는 구조에 집중되어 있었고 공업과 철도에 대한 투자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미국은 독립전쟁 때 제해권을 넘겨준 상태로 전술적으로 얻어터지면서도 전략적으로 '버티기'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고, 남부 정치인들은 미국 독립전쟁 때처럼 제해권을 넘겨줘도 어쨌든 '버티면' 북부가 알아서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라고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을 도와준 것처럼 면화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어쩔 수 없이 남부를 도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즉, 전혀 같은 상황이 아닌데도 비슷하게 어떻게 잘 굴러가겠지 하며 객관적으로 계산이 안 서는 상황에서 낙관론만으로 도박을 한 것으로 북부의 역량을 굉장히 얕잡아 봤다고 할 수 있겠다. 지속된 전쟁은 북부에게도 피해를 줬지만, 남부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줬다. 특히 당시 20억 달러의 가치가 있던 노예들이 전쟁이 끝나고 수정헌법 13조로 인해 한 방에 해방됨으로써 막대한 자산이 날아가게 되고, 파괴된 철도망 및 공업기반들은 남부인들이 아니라 북부인들의 자본으로 재건됨으로써 경제적 주도권을 북부에게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북부는 경제적으로 피해를 보기는 했으나, 전쟁 수행을 위해서 연방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출을 해준 덕택에 산업혁명에 불이 붙게 되었다. 이 시기 사람들이 록펠러, J.P. 모건, 카네기, 밴더빌트 등이 있다. 이들이 세운 산업기반이 아직까지 US Steel을 비롯해서 미국 곳곳에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